

2018년 5월 10일(목) 본문 : 신명기 4장 32~43절
2018년 5월 10일(목) 말씀묵상
본문 : 신명기 4장 32~43절
(32) 당신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이제까지, 지나간 때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큰일을 본 적이 있는지,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33) 당신들처럼,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은 백성이 있습니까?
(3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35) 그러나 당신들에게 이것을 나타내셨으니, 그것은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6)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단련하시려고, 당신들에게 하늘로부터 그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땅 위에서는 그의 큰 불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불 가운데서 그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37)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조상을 사랑하셨으므로, 뒤에 그 자손을 택하셨고, 그 크신 힘으로 몸소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38) 그리고 당신들보다 크고 강한 민족을 당신들의 앞에서 쫓아내시고, 당신들을 그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 땅을 유산으로 주어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39) 오늘 당신들은 마음에 새겨 분명히 알아 둘 것이 있으니, 주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참 하나님이시며, 그밖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40)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주는 주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잘 살게 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영원히 주시는 땅에서 길이 살 것입니다."
(41) 그 때에 모세는 요단 강 동쪽 해 뜨는 편에 세 성읍을 지정하였다.
(42) 그 곳은, 어떤 사람이든지 전에 미워한 일이 없는 이웃을 실수로 죽였을 경우에, 가해자가 이 성읍 가운데 하나로 피신하면 목숨을 건지게 되는 곳이다.
(43) 그 지정된 성읍들 가운데 하나는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평원지대 광야에 있는 베셀이고, 또 하나는 갓 지파가 차지한 길르앗에 있는 라못이고, 나머지 하나는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바산에 있는 골란이다.
1. 본문 이해
- 모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지를 상기시킨다(32절).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도 보고 들은 적이 없는 엄청난 일을 행하신 비교불가 하신 분이다. 시내 산에서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은 백성이 또 어디 있으며(33절), 애굽 사람들 앞에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벌벌 떨게 만드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당당하게 이끌어내시며 또한 대적들을 모두 홍해에 수장시켜버리시는 이러한 하나님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34절).
-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신이심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각인시켜주시기 위함이었고(35절), 또한 당신의 백성들을 백성답게 단련하고 훈련시키기 위함이었다(36절). 이렇게 하신 배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있었다(37절). 그 사랑이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이끄시고, 또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오늘에까지 이르게 만든 것이다(38절).
-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마음 깊이 분명하게 새기는 것이고(39절),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힘써 지켜 행하는 것이다(40절).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영원토록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시고 축복하신다(40절).
- 모세는 요단 동편 땅에 도피성 세 곳을 지정하였다(41절). 곧 베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바산 골란이다(43절). 도피성은 본의 아니게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소 같은 곳이다(42절).
2. 나의 묵상과 적용
- 과거는 소중하다. 그것으로 오늘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든 뿌리이기 때문이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경험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실패의 과거이든, 성공의 과거이든 중요치 않다. 모두가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한 과거도 유익할까 하는 그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부끄러웠던 행적과 경험들을 나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내 인생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쓸모없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처음 전도사로 부임해간 교회에서 학생부를 담당했는데, 거기서 나의 과거의 경험들이 얼마나 요긴했는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부에는 꼴통들이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학교의 일진에 속하는 건들거리는 아이들이 많이 출석했던 것이다. 그러니 학생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교회에서도 학생부로 인하여 상당한 우려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그런 세계를 경험해보았기에 누구보다도 그런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님은 나의 어둡고 불행한 과거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온실의 화초처럼 자랐다면 아마도 그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당당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을 믿고 난 이후에 체험했던 무수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도 나에겐 큰 힘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기적이라면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의 무수한 일들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져 갔음을 기억한다. 그러한 간증의 과거들이 있기에, 잠깐 동안 낙망하기도 하고 때론 넘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곤 했다. 그러기에 “지나간 때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라고 외치는 모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나간 때의 그 경험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큰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고, 중단 없는 목양의 길을 갈 수 있음을 고백한다.
-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전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불가항력적 은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나의 눈물과 땀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훈련과 연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도 무수한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이만큼 자라올 수 있었고,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훈련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으로는 불가한 영역이다. 삶의 체험과 체득의 영역이다. 성경이 ‘앎’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앎’이라는 것이 대부분 책상머리에 앉아서 연구해서 얻는 그러한 ‘앎’이 아니다. 체험과 체득을 통한 ‘앎’을 말한다. 그래서 이 ‘앎’이라고 하는 말의 어근은 ‘동침한다’이다.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은, 단순한 이력이나 지식의 앎이 아니라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감으로써 아는 체험적 앎이다. 하나님을 알아감에도 바로 이러한 ‘앎’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체험과 체득, 훈련과 연단의 과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는 점점 더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더욱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성장과 성숙이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이 일을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을 결코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러한 훈련과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고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멋진 믿음의 백성으로 서가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신 것은, 모세가 밝히는 바와 같이 바로 ‘사랑’에서 기인한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이 있었다는 말이다. 성도들을 향한 나의 사랑도 ‘각별’하기를 소망한다. 성도들의 바램과 기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목사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성도들을 넉넉히 품고 사랑하는 목사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사 나에게 장검을 들이대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 나에게 넘치게 되기를 원한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한 그 사랑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아니 만분의 일만큼이라도 흉내 낼 수 있고 닮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버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내가 품지 못할 성도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성도들을 더욱 깊이 사랑해줄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나에게 주시기를 구한다. 무엇을 하든 간에 ‘사랑’이 나의 동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사랑하기에 하는 목양이기를 원하고, 사랑하기에 하는 설교이기를 원한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이 아닌가?
-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영적 도피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도피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집중 포화를 받고 결국은 교회를 떠나버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나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이러한 도피처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실수와 잘못으로 인하여 여론의 뭇 매를 맞고 힘들어 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영적 도피처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어릴 적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고 비난할 때에도 내 어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셨다. 사람들의 비난을 당신이 온 몸으로 막으시면서까지 나를 보호해주셨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나를 품어주는 진정한 영적 도피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나도 그러한 성도들의 영적 도피처가 되어주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도피처가 되기는커녕 성도들을 판단하고 지적하고 공격하는 데 더 익숙한 것 같다. 성도들을 바르게 잡아주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풀이를 할 수도 있음이다. 이러한 부분을 진심으로 회개한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자라 할지라도 나는 비난을 멈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재활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다시 힘을 얻고 재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도피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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