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칼럼
어린이 주일을 맞아
2018년 5월 6일 목회칼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기 마련입니다.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노력한 만큼 결실은 있습니다. 골프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운동신경이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필드에 많이 나가는 사람이 잘 치게 되어 있습니다. 일 년에 필드에 몇 번 나가지 않으면서 골프를 잘 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골프에 투자한 만큼 실력도 거두는 법입니다. 흔히 실수도 실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실수가 많다는 것은 실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운동을 하면 실수가 줄어듭니다. 그런 노련미가 바로 실력인 것입니다.
운동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됩니다. 처음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셔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믿음에 아낌 없는 투자를 해야만 믿음이 자라납니다. 힘을 쏟고 애쓴 만큼 믿음이 자랍니다. 골프를 잘 치기 위해서 레슨을 받기도 하고 좀 더 좋은 골프채를 사보기도 합니다. 수시로 필드에 나가서 실력을 쌓기도 합니다. 보다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경건의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기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생활이라고 하는 힘든 여건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가급적 시간을 내어서 말씀공부와 훈련에도 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주일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봉사하십시오. 그런 것들이 믿음을 성숙시키는 방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이라는 것도 나의 필요와 나의 욕심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의 필요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의 믿음이 더욱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건강하게, 바르게 잘 자라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열심히 투자하고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쏟는만큼 믿음은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의 진보를 위해 더욱 전진하는 노력들이 요구되어 집니다.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이 세상의 것들 보다는 이왕이면, 영원한 믿음을 위해 자신의 귀한 것들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잘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열망이 우리 속에 불붙어야 합니다. 나태함과 게으름의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서 매력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이 봄에, 보다 적극적인 마음을 한 번 가져보는 것도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믿음의 진보
2018년 4월 29일 목회칼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나기 마련입니다.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노력한 만큼 결실은 있습니다. 골프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운동신경이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필드에 많이 나가는 사람이 잘 치게 되어 있습니다. 일 년에 필드에 몇 번 나가지 않으면서 골프를 잘 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골프에 투자한 만큼 실력도 거두는 법입니다. 흔히 실수도 실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실수가 많다는 것은 실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운동을 하면 실수가 줄어듭니다. 그런 노련미가 바로 실력인 것입니다.
운동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됩니다. 처음에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셔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믿음에 아낌 없는 투자를 해야만 믿음이 자라납니다. 힘을 쏟고 애쓴 만큼 믿음이 자랍니다. 골프를 잘 치기 위해서 레슨을 받기도 하고 좀 더 좋은 골프채를 사보기도 합니다. 수시로 필드에 나가서 실력을 쌓기도 합니다. 보다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도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경건의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기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민생활이라고 하는 힘든 여건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가급적 시간을 내어서 말씀공부와 훈련에도 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주일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봉사하십시오. 그런 것들이 믿음을 성숙시키는 방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이라는 것도 나의 필요와 나의 욕심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나라의 필요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의 믿음이 더욱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건강하게, 바르게 잘 자라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열심히 투자하고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쏟는만큼 믿음은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의 진보를 위해 더욱 전진하는 노력들이 요구되어 집니다. 일시적인 것이고 유한한 이 세상의 것들 보다는 이왕이면, 영원한 믿음을 위해 자신의 귀한 것들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잘 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열망이 우리 속에 불붙어야 합니다. 나태함과 게으름의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서 매력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이 봄에, 보다 적극적인 마음을 한 번 가져보는 것도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신뢰가 있는 세상
2018년 4월 22일 목회칼럼
여중생 한 명이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반에서 누군가가 돈을 잃어버렸는데 선생을 비롯하여 모두 이 학생을 범인으로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하소연을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학교는 소위 8학군이라고 하는 강남의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학생만이 유일하게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언제나 왕따 취급 받던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터에 돈이 없어지니까 모두들 이 학생이 돈이 궁하니까 훔쳤다고 단정하고 자백을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해서 무시당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이제는 도둑으로 몰리게 되니까 이 어린 소녀는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과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형성하며 삽니다. 이런 관계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깊이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관계가 깊어질수록 인생은 윤택해지고 행복해지게 됩니다. 신뢰가 풍성한 사회는 건강합니다. 밝습니다. 거기에는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과 칭찬과 격려가 있습니다. 나누는 아름다움이 있고 섬김의 향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이 많아질수록 인생은 사막과 같은 척박함과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신이 풍성한 사회는 병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늘 어둡고 칙칙합니다. 거기에는 서로를 향한 복수와 칼날만이 번득거립니다. 부정적이고 죽이는 말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분열의 추악함이 있고, 서로의 마음을 전혀 나누지 못하는 견고한 마음의 성들만 우뚝 서게 됩니다. 거기는 오직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먼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신뢰해주는 이런 일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우리의 각별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정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 구성원들 상호간에 충만한 신뢰가 있으면 가정은 천국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야 말로 스위트 홈이 됩니다. 그렇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불신하게 되면 다툼과 분열이 난무하게 되고,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 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로서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를 향한 깊은 인격적 신뢰의 끈입니다. 이 신뢰의 관계들이 잘 형성될 때 하나님의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든든히 서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
2018년 4월 1일 목회칼럼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중심과 목표가 바로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활 하나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투자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망하는 자들입니다. 많은 투자, 많은 정성이 헛되며,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망의 부활입니다. 전자는 천국에서의 부활이고 후자는 지옥에서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회복’이고 둘째는 ‘부흥’입니다. 생명의 부활 속에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회복됩니다. 모든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됩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했던 세상이 완전히 회복됩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됩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모습이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에덴이 회복됩니다. 생명의 부활 속에는 부흥의 능력도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회복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은 회복으로 시작해서 부흥으로 완성됩니다. 회복과 부흥은 본시 창조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밀알 하나 심으면 30배, 60배, 100배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 때 우리의 삶은 단순히 회복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흥의 능력까지 맛보게 되는 것이지요.
부활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모든 죽음과 실패는 생명과 성공으로 회복될 것이며, 우리의 악함과 추함은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모든 삶은 완전한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이 희망으로, 눈물과 슬픔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무기력한 신앙은 능력 있는 신앙으로 바뀌어 질 것이며,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약속한 바와 같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축복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오직 믿음으로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부요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을 믿음으로 하고, 직장생활도, 교회생활도 모두 믿음으로 합시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한 모든 일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될 때 부활의 산증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만큼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요. 이것만큼 성공한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직한 삶
2018년 4월 8일 목회칼럼
예전 토론토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한 성도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가게를 팔려고 내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게를 인수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놀랬습니다. 매일 그 비지니스를 위하여 기도를 해왔던 터였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욱이 살 때, 파는 사람의 말만 믿고 샀는데 알고 보니 너무 비싸게 산 겁니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다시 내놓아야 하는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분이 제게 기도부탁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해를 많이 보더라도 매상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가게를 팔고 싶어요. 사는 사람도 후회하지 않고 잘 샀다고 생각하도록 그렇게 팔고 싶어요.”
그분의 형편과 처지를 볼 때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눈만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기에 파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고, 사는 사람들은 속지 않고 제대로 사야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더군다나 살 때 속아서 비싼 값에 샀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손해가 막심한데 팔 때에 정직하게 팔기 위해서 다시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눈물겨운 그 용기에 진정한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여전히 곳곳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곳에서 물질에 비굴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희생과 손실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고 향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바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세상의 역사가 들러리적인 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주도되고 움직여왔다고 갈파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사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수는 언제나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왔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왔습니다. 부패한 시류에 몸을 맡기고 상호 공생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가 건실함을 유지하고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류를 거스르는 살아있는 ‘창조적 소수’의 신앙인들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온갖 오물들이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렇게 흘러 들어오는 오물들을 정화시키는 바다의 염도는 기껏 삼 퍼센트 전후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 필요한 자들이 바로 이 삼 퍼센트의 영적 염도를 지닌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직과 진실 그리고 성실함으로 그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성도들이야 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주인공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선택의 인생
2018년 4월 15일 목회칼럼
인생은 그 자체가 선택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내 꿈과 이상에 걸맞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선택하기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말 원치 않는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크고 작은 선택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과 질이 결정되어집니다.
선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가치관입니다. 인생관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치관은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그 우선순위에 따라서 선택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정하게 됩니다. 학교를 정하고, 직업을 정하고, 배우자를 정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나의 가치관이라고 하는 시각 안에서 되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선택이든 간에 모든 선택은 내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선택하든 자의로 하든, 어쨌든 간에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습니다.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목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서 이 길을 갑니다. 누가 가라고 강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예언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저로 하여금 목회를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시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즐겁게, 그리고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주님이 주셨기에 기꺼이 제가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후에,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제가 가는 이 길에 대해 큰 확신과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자원하는 마음이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꺼이 이 길을 선택했고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이민목회를 하게 된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결국은 제가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제 계획대로 되어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만 순간순간마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안에서 기쁨으로 정도를 걸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조용히 저를 지켜보셨습니다.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정을 하고 시행착오를 할 때도 적잖았겠지만 우리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인도해 해주셨습니다.
제가 가는 미래의 길에서도 제가 어떤 선택들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즐거운 선택도 있겠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주님이 저와 동행해 주시고 저를 돌보아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